2448문파인아츠 작품 소장
윤병운
자각몽, 꿈의 한계
자각몽이 꿈속에서의 현실인식이라면 내 작업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만나는 꿈의 흔적이다.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수면상태는 내가 나타내고자하는 복합적인 경계의 틈을 대변하고 있다.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중첩된 상태에서 삶의 본질은 더욱 선명해 진다.
내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은 그것을 선택한 당사자인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영화 속에서 클리셰(cliche)가 되어버린 장면들은 창작의 법칙이 주는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이러한 단선적인 구조로부터 빗겨 나오고 싶은 나의 무의식이 작용했을까? 내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들에 대한 모호할 수밖에 없는 설명은 견고한 법칙의 틀을 최소화하거나 적어도 작가 스스로 외면해 버리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
이렇게 모호함으로 가득한 세계를 더욱 모호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작품의 사실적 표현은 당연한 방법론일지도 모른다. 서로 반대편에 서서 바라보며, 호흡하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라도 나는 그 모호한 세계에 경계의 선을 더 선명하게 내리 긋는다.
내 작품이 꿈꾸는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로도 잠들지 못하고, 의식의 세계로도 깨어날 수 없는 정확하게 모호한 그 지점이다.
안윤모
작가는 우리 문명과 사회를 향해 냉소와 비판의 태도를 약간은 유머러스하게 꼬집으면서도 희망이 담긴 메시지들을 간결하고 산뜻하게 전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의 특정 주제를 설정해 항상 새롭고도 다양한 내용과 방법을 선보여 왔다. 방법은 다양해도 추구하는 미학은 항상 소통을 중시하고 무거움이나 난해함보다는 상상력이 풍부한 가볍고 산뜻한 이야기로써 즐거움을 주는 미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정형과 비정형의 다양한 쉐이프트(캔버스 자체가 형태를 갖는) 캔버스 페인팅, 작가와 관객이 상호 작용하는 인터랙티브가 풍부한 설치, 담백하고도 극적 완성도가 인상적인 도각 및 퍼포먼스 등이 결합된 입체적인 전시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자유롭고 감각적인 심미적 토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강지만
강지만 작가의 얼큰이는 경쟁으로 지쳐가는 허무감과 소외감, 이 때문에 스트레스로 머리만 커져 버린 현대인의 표상으로 태어난, 우리 삶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캐릭터이다. 그러나 작가는 얼큰이를 재치 넘치는 표정과 생기 있는 색감으로 표현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순간 웃음을 자아내도록 장치함으로써 힘든 현대인들에게 아직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재미나고 따뜻함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긍정적 에너를 통해 작가 특유의 낙천주의를 선보인다.
조부경
공간, 너머의 공간
어떤 순간에 특별한 시선을 끄는 장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지속적으로 다양한 자극과 울림을 준다. 공간이 익숙해지면 집의 구조(형태)는 특별한 자극을 주지 않는다. 구조에 대한 자극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형태 외의 시간, 계절, 빛의 진동, 색의 변화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간의 응시에서 작가는 특별한 시각적 경험을 수년간 지속해왔고, 그 결과가 현재의 작품으로 드러난 것이다.
유미선
유미선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 유럽인들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마치 단색의 작업처럼 보이는 작품들은 낯설면서도 동시에 편안한 신뢰감을 관람객에게 불어넣는 이상향을 연상하게 된다.
유미선 작가의 작품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느낌을 매우 오랫동안 지우지 못하게 하는 여운을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오랫동안 이어 내려온 낙원, 또는 이상향에 대한 향수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작가의 작품 바탕인 캔버스는 전형적인 이상향인 세상의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끊임없는 자연을 보여주는 프레젠테이션 화면과도 같다.
그러나 유미선 작가가 감상적인 면만을 추구하는 오류를 배척하지 않았었다면 아마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현대 작가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암의 차이를 이용한 채색들은 작품의 내적, 외적인 성격을 세상의 부조화와 불일치를 묘사하고 있는 추상적인 세상으로 끌어드린다.
James Nietsch (독일 Malinz 미술대학 교수)
유선태
유선태는 캔버스위에 ‘말’과‘글’이라는 단어를 그리듯이 써 내려가는 방식을 통하여 동양적이기도, 서양적이기도 한 작품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준법으로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오래된 오브제 혹은 직접 만든 오브제 위에 쓴 ‘말’과 ‘글’이라는 단어로 대상을 묘사함으로써 작가가 오랜 외국 생활에서 경험한 문화의 차이, 미술의 경우 표현하는 방법과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등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 동안의 ‘말과 글 ’시리즈가 동양적인 정서를 가지고 서양화의 기법을 사용하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 이였다면, 근작은 일상적인 풍경, 체화된 그림 속에서 사물의 의미와 개념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구현한 작품들이다. 이를 통해 회화와 설치, 동양과 서양, 일상과 예술의 서로 다른 질서들 사이에서 ,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작가 자신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선태는 형식적으로 인지하고 스쳐가는 사물과 세계, 풍경의 이면, 그 너머의 직감적이고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감성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작품을 선보이며, 보이는 이에게 개별적인 사유와 명상의 풍경으로 인도한다.
2011년 4월, 비평가 윤진섭
권순익
흙을 사랑하고 흙으로부터 예술적인 모티브를 찾아온 권순익의 그림은 흙과 같은 생명력은 물론이고 부드러운 감성까지 함축하고 있다. 흙을 빚는 도예가로서 예술을 시작한 권순익은 무엇보다도 흙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예술을 이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본성과 생명의 소중함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작업 세계를 꾸준히 가꾸어가고 있는 그의 작품은 마치 부드러운 흙을 만지듯 포근하며 담박하다. 그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여러 형상들이 마치 흙으로 살짝 덮어버린 것처럼 자리하고 있다. 흙먼지가 하나둘씩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 그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은밀하고도 은은하게 감춰져 있다. 악기 연주자 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나올 법한 대형 물고기 등이 흐릿하다. 그는 많은 시간과 공력으로 정교하고도 성실하게 잘 표현된 여러 형상들을 다시 흙 속에 묻어버리는 것처럼 주저 없이 지운다. 그러기에 권순익의 그림에는 ‘버림’의 미학이 공존하는 것 같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하나하나 훌훌 털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처럼 소중히 여기고 집착해온 것들을 버리는 작업은 쉬운 게 아닌 것이다. 고생하며 그려서 얻은 멋진 형상을 다시 물감 속에 묻어버리는 작업은 집착을 벗어난 초연함과 여유로움을 지닌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권순익은 흙처럼 고운 심성으로 무욕의 경계를 넘나들 듯이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오늘도 고요하고 적적할 것만 같은 작업실 한 구석에서 작업 삼매경에 빠져 있음에 분명하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막걸리와 같은 텁텁한 여운과 은근한 형상들에서 나오는 버림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최영욱
기억의 이미지
나의 그림은 기억의 이미지화, 소통의 매개체다 .기억은 특정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미지를 통해 기억은 표출된다. ‘지각과 경험의 울타리'(기억)에 근거해 어떤 의도가 시도되고 감정이 표출되고 소재나 재료, 색감이 선택되고 이것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결국 내가 표현한 이미지는 내 삶의 기억, 내 삶의 이야기들이다. 도자기는 내 삶의 기억들의 이미지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영섭
이영섭은 자신의 작업을‘발굴’이라 지칭한다. 자신의 작업을 땅에 묻고 그것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꺼내는..
행위가 마치 고고학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땅속에 묻힌 조각은 세월이 흐르면서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져 나온다. 인간의 표현만으로 불가능한 섬세한 표현을 자연이 함께 해주는 것이다.
유종호
그는 화강암이나 마천석 혹은 대리석으로 이네를 조각한다. 그의 작품은 체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어떤 가식도 없다. 말 그대로 나이브한 돌조각이다. 형태를 매끄럽게 다듬거나, 정으로 쪼아 난 흔적을 없애거나 하는 일에 힘쓰지 않는다. 무심하게 돌 속에 숨어있는 자신의 심상에 존재하는 형태를 쫓아 정과 망치를 움직인다. 그렇게 움직여 낸 작품은 전혀 인위적이지 않다. 인체를 인체답게 만들거나, 아니면 더 아름답게 과장하거나 혹은 특정 부분을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아니면 손발을 생략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말 그대로 있을 건 다 있지만 가공한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투박한 작품이다.
유종호의 작품은 토속적인 미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토속적이라고 하는 것은 번지레하거나 치장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우리의 옛 풍경들, 초가집과 그 곳을 채우고 있는 다듬지 않은 물건들, 세속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 이런 것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유종호의 조각 작품을 토속적으로 여기게 하는 것이다.
김원숙
김원숙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특징은 서정시적 감성이다. 그의 화폭은 거창한 수식어가 가미되지 않은 그러나 잊혀진 기억과 상념들을 생생하게 그리고 조용히 환기시키는 하나의 시와 같다. 이 시화 속에서 그는 삶의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 부드러움과 잔인함을 함께 담아 보낸다. 마치 영원히 그러나 무정하게 흐르는 강 위에 배를 띄우듯, 간혹 섬광과 같이 거대한 실루엣이 모든 것을 삼킬 듯 감싸 안는다.
얼핏보면 극히 개인적인 내면의 일상들로 보이나 실상 그의 그림들은 인생에 대한 메타포와 삶의 신비를 담고 있다. 그가 빈번히 그림에 등장시키는 강물은 삶 혹은 시간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삶의 행로에 교차하는 신과 인간의 사랑,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두움, 염원과 믿음 등의 깊은 의미를 그는 그의 그림들에서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배정혜
오순환
박남철
박남철의 그림은 파랗다. 그저 맑고 투명한 파란색이다. 그것은 색을 넘어서는 푸르름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중 하나로서의 파란색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만의 파란색이다. 그의 그림은 온통 파래서, 하다못해 그의 녹색 그림은 초록빛 파란색으로 보이고, 빨간색 그림마저 붉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그의 파란색은 하늘 빛을 닮아 있다. 환하던 대낮이 어두운 밤으로 바뀌는 기적 같은 순간, 온 세상이 순간적으로 파르스름 한 빛으로 가득 차는 엄청난 변화의 순간에 하늘을 뒤덮는 푸르름.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의 빛이 아니다. 경건함이 담겨있는 바라보는 자의 마음마저 파랗게 물들여 한없이 착해지게 만드는 힘이 담겨있는 푸르름. 밤새도록 바흐와 핑크플로이드를 끝도 없이 들으며 맑고 밝은 눈빛으로 밤 하늘을 바라 볼 때, 눈 내리는 밤이면 더욱 좋겠지, 바로 그때, 문득 새벽이 되어 세상이 다시 깨어날 때, 하늘을 온통 뒤덮는 바로 그런 푸르름.
그 하늘을 한번 들여 마실 때 느껴지는 진한 그리움이 나를 행복하게 하듯이 박남철의 파란 하늘은 바라볼 때마다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감사한 일이다.
김주환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임은희
…그녀는 오로지 색 하나만 승부를 걸려는 듯 꽃밭을 둘러싼 모든 사물들에게 강렬한 색채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생명의 기운은 마티스처럼 ‘고통스럽지도’, ‘추하지도’, ‘거칠지도’ 않다. 여자이어서 그런 것일까. ‘나쁜’ 모든 것들을 자신의 내면에 감싸 안은 모성애. ‘나쁜’ 것들을 오롯이 극복하고, 원초적인 감각만으로써의 ‘꽃밭’, 그런 ‘생명의 꽃밭’으로 향하려는 의지. 밀실, 그녀의 음밀한, 사적인 광장은 그래서 더욱더 순수하고 마술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유혹한다…
우광훈 / 소설가
정일
정일은 추상미술과 연결된 모더니즘이나 구체적 현실의 묘사작업과는 거리가 먼 환상적 세계를 그려왔다.「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동화」를 생각나게 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상상과 환상의 무언극을 위한 무대가 그의 조형세계였다. 이와 같은 환상적 그림은 잠시 우리의 현실을 잊게 할뿐만 아니라 현실 저편의 아름다운 세계를 방문하는 독특한 미술로 어느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기호나 암시적 형태로 상징화된 환상에 머물고 있지만은 않다.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자세는 직선적이며 대단히 솔직하게 나타난다. 즉 형식적 틀을 없애버린 어린아이와 같은 그림이 그의 조형적 특성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어린아이처럼 만들고 있다. 누구나 사랑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그의 그림은 방황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속삭임으로 현실 저편의 아름다운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김동철
김동철은 자연풍경을 그린다. 그러니 풍경화가이다. 하지만 막상 그의 풍경화를 보면 단순히 풍경화라고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의 눈에 익은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나 인상주의 화풍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기존의 어느 표현의 양식에도 선뜻 대입하기가 어려운 독자적인 관점이 반영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독특하다는 것은 주관적인 시각이 형성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는 자연을 보는 방식이 남다르다. 마음의 우유 빛 유리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우유 빛 유리를 통하면 구체적인 형태가 걸러짐으로써 희미한 안개 풍경과 같은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는 이처럼 구체적인 형태미를 여과하여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처리한다.
이처럼 그의 시선은 자연의 외적인 형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일반적인 풍경화의 형식을 벗어나 있다. 이는 시각적인 이해의 울타리 바깥에 자리하는 미묘한 자연현상을 주시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시각으로 낱낱이 파악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닌 정서적인 감응을 유도하는 자연현상을 포착하려는 것이다. 물론 안개나 물 비늘, 수면에서 반사하는 햇빛 따위는 시시각으로 분별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자연현상에서는 시각적인 이해보다 감정적인 반응이 선행한다. 정서적인 감응이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정서적인 효과를 극대화 하고자 한다.
신항섭 / 미술평론가
반미령
반미령의 회화는 연작 형식으로 꿈으로부터 시작한다. 코스모스를 꿈꾸는 카오스(1995)와 꿈꾸는 코스모스(2001), 꿈꾸는 창(2005), 그리고 신세계를 꿈꾸며(2007) 등 근작에 이르기까지 꿈을 그리고 있다. 그의 꿈은 현실과 환상의 조화이다. 사각 문이나 아치형의 창을 통해 보여 지는 하늘과 바다, 사막, 기다란 벽, 그림자, 화병과 꽃, 그리고 꽃이 핀 열린 서랍장 등 자연과 현실의 오브제 묘사가 꿈같은 환상주의를 만들어 내고 있다.
특이한 것은 창이라는 닫힌 공간과 하늘이나 바다라는 열린 공간의 대비가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색채의 투명함과 사물의 극사실 묘사와 같이 몽환적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아울러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성이 혼합되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의 ‘사이’(작가는 이것을 ‘고비’라고 설명한다.)를 넘나드는 연작이 제작된다.
이처럼 현실과 꿈, 환상을 담고 있는 반미령의 회화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상반된 세계가 공존한다. 작가는 이것을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세계는 하나가 아닌 두 개, 혹은 세 개가 존재하며, 사막을 지나, 도시를 뒤로 한 채 부드러운 곡선의 창틀이 있는 방에도 있고, 창밖으로 펼쳐 보이는 푸른 바다와 환영”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의 작품은 현실과 꿈,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환상의 공간들로 사실과 초현실의 새로운 회화적 표현이다.
유재길 (홍익대학교 교수, 미술비평)
김철성
변용국
김은기
어린이의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동화라고 한다. 동화의 힘은 현실의 여러 가지 제약을 쉽게 뛰어넘어 버린다는 데 있다. 어린이들의 생각이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상상력으로 포장된 동화 속에는 언제나 보편적 진리가 있다. 그래서 동화는 문학의 한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동화적 문법은 회화에서도 위력을 발휘해 왔다. 마르크 샤갈은 부초처럼 떠돌 수밖에 없는 유대인의 비극적 숙명과 정신 세계를, 파울 클레는 음악적 감수성으로 분칠한 환상미를, 호안 미로는 인간 마음 맨 밑바닥에 숨어 있는 유희적 본성을, 앙리 루소는 어린이적 소박한 감성으로 바라본 세계를 동화적 문법으로 풀어내 서양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작가가 되었다.
김은기의 회화는 장식적이며 예쁘다. 그런 만큼 가볍다. 어찌 보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느낌까지 든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길을 쉽게 끌어당긴다. 그런데 그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는 요소가 있다. 교훈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그가 그림에서 하는 잔소리는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것이 김은기 회화의 매력이다.
전준엽(화가)
가국현
풍경, 그 인상적 이미지
고대 유물에서 보여지는 벽화그림의 위대함은 예술이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생물학적 본능 이상의 인간 내면의 욕구를 표현한데 있다고 본다. 그것이 종족번식의 염원이든, 불멸에 대한 믿음이든, 유희를 즐기는 표현수단이든 인간만이 가진 ‘상상’에 대한 표현욕구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며 사는 일이 때로는 운명조차 초월한 사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일확천금을 내리는 것도 아닌데 오늘 붓을 들고 내일 다시 붓을 들어도 늘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같은 것이 고대인들이 벽화를 그리며 불멸을 염원하던 피가 내 안에서 끓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시절의 어느 순간이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숙고와 실험에서 아직 그 작품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시점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즐기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예술가의 리얼리티’ 라는 예술철학서에 의하면 -예술가의 역사는 예술가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시대가 변화무쌍하게 변화하고 예술의 정의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소유자로써 환경적 요인에 의해 도전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절감하게된다. 그러나 예술가라면 한번쯤은 ‘불멸의 작품’이 내게서 만들어 질수 있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 꿈에 대한 포기가 없는 한 나는 숨을 쉬듯 미지의 작품들과 만날 것이며 그 안에서 수없는 고뇌와 유희를 반복할 것이고 화가로써의 남은 평생을 포기하지 않는 도전자로 불사르고 싶다.
작가노트 가국현
전영근
그림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또는 앞으로 잃어버릴 것을 미리 그려낸다. 기억들은 뭉뚱그려져 하나의 씬을 이룬다. 자동차가 달리는 것은 길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인 것이다. 비록 망각되었을지라도 만물은 자신의 이름이 있다.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이야기 했으며 또 무엇이 되어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어도 세상은 가득 차 있고 우리는 그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름 모를 것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전 마르셀 프루스트가 사소한 기억을 떠올리면 시작하였던 장대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낯선 시간은 결코 처음이 아니라 반복해서 펼쳐졌던 시간들인 것이다. 이미지들의 길고긴 행렬이 벌어진다. 그것은 기억의 행진일 지도 모른다. 체험을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기억에 대해 기억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현대성의 끝에서 그림그리기의 즐거움이 등장한다. 작가는 아주 밝은 빛이 투사된 꿈을 ‘함께’꾼다. 물감과 붓질 사이로 의식과 무의식이 교묘하게 얽혀들고, 기억과 망각이 서로의 경계로 흘러간다.
아트페이스 휴 대표 김노암
이영지
하의수
…하의수의 화면 구성에 뛰어난 감성은 시처럼 한두 마디의 붓질로 공간을 가로 지르며 균형을 찾아내는 추상적인 힘에 깊은 시적 매혹이 있다. 그 공간의 중앙 혹은 귀퉁이에 비교적 여린 필치로 섬세하게 묘사된 소통 할 수 없는 이 생물과 무생물의 대화가 동일한 공간속의 상황이야 말로 하의수 그림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그것은 동시에 소통의 부재를 인정 하면서 공존 하는 서로를 향한 숙명적 관계이다. 지상과 현실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관계의 부조리. 의자와 새들이 나누고 있는 설정은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고민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그는 그러한 일상적 관계가 현실에서 불가능 하지만 꿈속에서 가능 한 아니 그러한 관계가 가능하다고 그림들은 들려준다. 자연과 사물을 보고 두 가지 대화를 상상하는 작가의 시각은 그래서 유혹적인 끌림이 있다. 예를 들면 침묵하고 놓여있는 꽃이나 의자 책상 등을 보고 한 마리의 비상하는 새가 뿌려 놓는 화법, 그 날아다니는 것과 고정 되어 있는 것과의 관계를 바라다보는 작가의 순수한 눈빛과 시선, 지상에 두 발을 디딘 채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늘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꿈을 꾸게 하는 그는 그래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화폭속의 새와 다르지 않다…
미술 평론가 김종근 글 ‘빈 공간에 그림, 빈 마음에 흔적’ 중에서
이수동
이오성
Michel Delacroix
Andre Bourrie
Christine Thouzeau
17. 홍현주
1981년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1999년~ 공예 작업실 및 매장 ‘La Chaise’ 창립, 운영
2008 년~ 라쉐즈 재팬 창립
2009 년~ 악세서리 브랜드 the crystal by La Chaise 런칭
전시
2009 년 개인전 와타시노헤야 (동경 지유가오카)
2009 년 그룹전 이세탄 백화점 (동경 신주쿠)
2010 년 개인전 마쯔야 백화점 (동경 긴자)
2011 년 그룹전 뉴오타니 호텔 (동경 아카사카)
2011 년 그룹전 미쯔코시 백화점 (동경 니혼바시)
2011 년 개인전 가나아트센터 (부산 해운대)
2012 년 개인전 가나아트센터 (부산 해운대)
2013 년 그룹전 홍콩 아트페어 (홍콩)
2013년 개인전 갤러리전(대구)
2013년 그룹전 아시아호텔아트페어 (서울 콘라드 호텔)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