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8과 함께하는 작가 2448 Artists

1, 미셸 들라크루아 (Michel DELACROIX)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프랑스 화가 Michel Delacroix는 1933년 Paris 에서 태어나 Ecole des Beaux Arts에서 전문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가 태어나 자라고 현재까지 살고 있는 마치 마법과도 같은 도시 파리의 구석구석을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그 시절의 Paris>라는 이름으로 표현해 냈으며 그의 온 생애를 작품 활동에 헌신하였다.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꿈과 같이 담아낸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마치 “時적인 과거의 시간들”과 조우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늘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그의 작품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파리는 우리에게 한층 더 특별하게 다가오며 진정한 <Paris의 즐거움>을 만나면서 삶의 잔잔한 기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이상적이면서도 평범하고 동시에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가득한 그의 작품에는 낭만이 가득 차 흐르고 있으며 무엇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유년시절을 떠 올리게 하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러한 그의 작품들로 Prix Public (Prix Pro art, morges, Switzerland. 1973), Grand Prix des Amteurs d’Art(Paris. 1976), The Grand Prix Dela Cote d’Azur(Canne. 1976), The Primire Prix de Sept Collines (Rome.1976)을 포함해 셀 수 없이 많은 상을 받았다. 특히 Michel Delacroix 는 Paris의 Fond National’Art에 참여하여 그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현대 예술가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Musse International d’Art Naif와 Foundation Max Fourny in Paris를 비롯한 세계의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안윤모

작가의 그림들은 하나 같이 편안하고 소박하다. 그러면서도 그 그림들을 보면서 가벼운 미소를 짓게 된다. 바로 그 지점을 작가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지나치게 슬픈 비극, 아니면 폭소를 터뜨릴 만한 코미디와 같이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담담하게 표현된 이미지들을 바라보다 보면 문득 주인공으로 등장한 동물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정작 삶의 늪에서 지혜와 여유를 모두 읽고 허우적대는 우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작가의 파편적이 조각 그림 연출도 역사성이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캔버스 유화가 나타나면서 그림은 벽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림이 지본에 대해 교환 가치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동 가능한 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 20세기 후반부터 예술의 패러다임이 전체의 일원적 구조에서 파편적인 것들의 재구성으로 전환되면서, 그림은 표현의 장으로서만이 아니라 공간 연출을 위한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우상과도 같은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패러디라도 하듯, 강익중 안윤모 등이 바로 조각 그림들을 나열, 반복시키는 식의 연출을 하면서 하나의 시대 양식으로 결정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더 많은 파편들이 모일수록 심미적 가치 또한 풍부해진다는 것을 간파한 응용적 발명인 것이다. 요컨대 작가는 작품 앞에서 수다스러움보다는 관조를 요구하고 있다. 동물 이미지들 몇 개가 정숙을 지시하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 글쓰기조차도 수다스러움의 하나 아닌지…“쉿!”….

이재언 (미술평론가)

 

작가노트 – ‘자각몽, 꿈의 한계’

자각몽이 꿈속에서의 현실인식이라면 내 작업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만나는 꿈의 흔적이다.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수면상태는 내가 나타내고자하는 복합적인 경계의 틈을 대변하고 있다.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중첩된 상태에서 삶의 본질은 더욱 선명해 진다.내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은 그것을 선택한 당사자인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영화 속에서 클리셰(cliche)가 되어버린 장면들은 창작의 법칙이 주는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마도 이러한단선적인 구조로부터 빗겨 나오고 싶은 나의 무의식이 작용했을까? 내 작품에 등장하는대상들에 대한 모호할 수밖에 없는 설명은 견고한 법칙의 틀을 최소화하거나 적어도 작가 스스로 외면해 버리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

이렇게 모호함으로 가득한 세계를 더욱 모호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작품의 사실적 표현은 당연한 방법론일지도 모른다. 서로 반대편에 서서 바라보며, 호흡하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라도 나는 그 모호한 세계에 경계의 선을 더 선명하게 내리 긋는다.

내 작품이 꿈꾸는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로도 잠들지 못하고, 의식의 세계로도 깨어날 수 없는 정확하게 모호한 그 지점이다.

 

4. 김은기

 

“어린시절, 가장 행복했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특히 미국 유학시절 접했던 한 권의 동화책은, 그녀의 그림 작업의 방향과 목표를 정확하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초원의 집>이라는 동화였어요. 내용은 단순했는데 참 감동받았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림, 편안한 쉼을 줄 수 있는 위로가 되는 그림…”

저 흰 눈이 쌀밥이었으면 하는 허기진 사람들의 어깨에도, 떠나보낸 잎사귀를 그리워하는 겨울나무의 어깨에도 축복처럼 흰 눈이 내렸다. 이 눈은 세상 어딘가에 잠복해 있던 시간 여행 유전자를 부추기는 것 같다. 눈에 덮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차원 이동을 해버린 듯하다. 이 풍경 속에 스노우맨이 서 있다. 상상의 숲에서 걸어 나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고는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아저씨.

올해로 서른두 살이 된 명작 동화 <눈사람 아저씨> 속의 스노우맨이 생각나 나는 벙싯 웃었다. 레이먼드 브리그스가 지은 <눈사람 아저씨>의 스토리를 떠올려본다. 눈사람을 만들고 잠이 든 소년에게 살아 움직이는 눈사람 아저씨가 찾아온다. 소년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저씨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눈사람 아저씨는 소년의 손을 잡고 밤하늘을 날아 얼음탑과 얼음성의 동네인 북극으로 데려간다. 다음 날 아침, 꿈에서 깬 소년은 목도리와 모자만 남긴 채 녹아내린 눈사람을 보게 된다. 이 단맛 나는 그림 동화를 김은기 작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로 세공해 한 폭의 유화로 만들어냈다.

<행복이 가득한 집> 인터뷰 내용 중

 

5.가국현

 

작간노트 – ‘풍경, 그 인상적 이미지’

고대 유물에서 보여지는 벽화그림의 위대함은 예술이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생물학적 본능 이상의 인간 내면의 욕구를 표현한데 있다고 본다. 그것이 종족번식의 염원이든, 불멸에 대한 믿음이든, 유희를 즐기는 표현수단이든 인간만이 가진 ‘상상’에 대한 표현욕구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며 사는 일이 때로는 운명조차 초월한 사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일확천금을 내리는 것도 아닌데 오늘 붓을 들고 내일 다시 붓을 들어도 늘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같은 것이 고대인들이 벽화를 그리며 불멸을 염원하던 피가 내 안에서 끓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시절의 어느 순간이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숙고와 실험에서 아직 그 작품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시점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즐기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예술가의 리얼리티’ 라는 예술철학서에 의하면 -예술가의 역사는 예술가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시대가 변화무쌍하게 변화하고 예술의 정의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소유자로써 환경적 요인에 의해 도전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절감하게된다. 그러나 예술가라면 한번쯤은 ‘불멸의 작품’이 내게서 만들어 질수 있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 꿈에 대한 포기가 없는 한 나는 숨을 쉬듯 미지의 작품들과 만날 것이며 그 안에서 수없는 고뇌와 유희를 반복할 것이고 화가로써의 남은 평생을 포기하지 않는 도전자로 불사르고 싶다.

6. 강지만

 

강지만 작가의 얼큰이는 경쟁으로 지쳐가는 허무감과 소외감, 이 때문에 스트레스로 머리만 커져 버린 현대인의 표상으로 태어난, 우리 삶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캐릭터이다. 그러나 작가는 얼큰이를 재치 넘치는 표정과 생기 있는 색감으로 표현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순간 웃음을 자아내도록 장치함으로써 힘든 현대인들에게 아직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재미나고 따뜻함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긍정적 에너를 통해 작가 특유의 낙천주의를 선보인다.

 

 7. 김원숙

 

김원숙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특징은 서정시적 감성이다. 그의 화폭은 거창한 수식어가 가미되지 않은 그러나 잊혀진 기억과 상념들을 생생하게 그리고 조용히 환기시키는 하나의 시와 같다. 이 시화 속에서 그는 삶의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 부드러움과 잔인함을 함께 담아 보낸다. 마치 영원히 그러나 무정하게 흐르는 강 위에 배를 띄우듯, 간혹 섬광과 같이 거대한 실루엣이 모든 것을 삼킬 듯 감싸 안는다.

얼핏보면 극히 개인적인 내면의 일상들로 보이나 실상 그의 그림들은 인생에 대한 메타포와 삶의 신비를 담고 있다. 그가 빈번히 그림에 등장시키는 강물은 삶 혹은 시간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삶의 행로에 교차하는 신과 인간의 사랑,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두움, 염원과 믿음 등의 깊은 의미를 그는 그의 그림들에서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8. 박남철

 

박남철의 그림은 파랗다. 그저 맑고 투명한 파란색이다. 그것은 색을 넘어서는 푸르름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중 하나로서의 파란색이 아니라 이 세상에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만의 파란색이다. 그의 그림은 온통 파래서, 하다못해 그의 녹색 그림은 초록빛 파란색으로 보이고, 빨간색 그림마저 붉은 파란색으로 보인다.

그의 파란색은 하늘 빛을 닮아 있다. 환하던 대낮이 어두운 밤으로 바뀌는 기적 같은 순간, 온 세상이 순간적으로 파르스름 한 빛으로 가득 차는 엄청난 변화의 순간에 하늘을 뒤덮는 푸르름.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의 빛이 아니다. 경건함이 담겨있는 바라보는 자의 마음마저 파랗게 물들여 한없이 착해지게 만드는 힘이 담겨있는 푸르름. 밤새도록 바흐와 핑크플로이드를 끝도 없이 들으며 맑고 밝은 눈빛으로 밤 하늘을 바라 볼 때, 눈 내리는 밤이면 더욱 좋겠지, 바로 그때, 문득 새벽이 되어 세상이 다시 깨어날 때, 하늘을 온통 뒤덮는 바로 그런 푸르름.

그 하늘을 한번 들여 마실 때 느껴지는 진한 그리움이 나를 행복하게 하듯이 박남철의 파란 하늘은 바라볼 때마다 나를 행복하게 한다. 감사한 일이다.

김주환 (미술평론가.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9. 유미선

 

유미선 작가의 작품 세계

유미선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 유럽인들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마치 단색의 작업처럼 보이는 작품들은 낯설면서도 동시에 편안한 신뢰감을 관람객에게 불어넣는 이상향을 연상하게 된다.

유미선 작가의 작품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느낌을 매우 오랫동안 지우지 못하게 하는 여운을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오랫동안 이어 내려온 낙원, 또는 이상향에 대한 향수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작가의 작품 바탕인 캔버스는 전형적인 이상향인 세상의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끊임없는 자연을 보여주는 프레젠테이션 화면과도 같다.

그러나 유미선 작가가 감상적인 면만을 추구하는 오류를 배척하지 않았었다면 아마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현대 작가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암의 차이를 이용한 채색들은 작품의 내적, 외적인 성격을 세상의 부조화와 불일치를 묘사하고 있는 추상적인 세상으로 끌어드린다.

James Nietsch (독일 Malinz 미술대학 교수)

10. 유선태

 

유선태는 캔버스위에 ‘말’과‘글’이라는 단어를 그리듯이 써 내려가는 방식을 통하여 동양적이기도, 서양적이기도 한 작품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준법으로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오래된 오브제 혹은 직접 만든 오브제 위에 쓴 ‘말’과 ‘글’이라는 단어로 대상을 묘사함으로써 작가가 오랜 외국 생활에서 경험한 문화의 차이, 미술의 경우 표현하는 방법과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등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 동안의 ‘말과 글 ’시리즈가 동양적인 정서를 가지고 서양화의 기법을 사용하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 이였다면, 근작은 일상적인 풍경, 체화된 그림 속에서 사물의 의미와 개념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구현한 작품들이다. 이를 통해 회화와 설치, 동양과 서양, 일상과 예술의 서로 다른 질서들 사이에서 ,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작가 자신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유선태는 형식적으로 인지하고 스쳐가는 사물과 세계, 풍경의 이면, 그 너머의 직감적이고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감성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작품을 선보이며, 보이는 이에게 개별적인 사유와 명상의 풍경으로 인도한다.

2011년 4월, 비평가 윤진섭

 

11. 전영근

 

그림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또는 앞으로 잃어버릴 것을 미리 그려낸다. 기억들은 뭉뚱그려져 하나의 씬을 이룬다. 자동차가 달리는 것은 길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인 것이다. 비록 망각되었을지라도 만물은 자신의 이름이 있다.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이야기 했으며 또 무엇이 되어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어도 세상은 가득 차 있고 우리는 그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름 모를 것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전 마르셀 프루스트가 사소한 기억을 떠올리면 시작하였던 장대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낯선 시간은 결코 처음이 아니라 반복해서 펼쳐졌던 시간들인 것이다. 이미지들의 길고긴 행렬이 벌어진다. 그것은 기억의 행진일 지도 모른다. 체험을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기억에 대해 기억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현대성의 끝에서 그림그리기의 즐거움이 등장한다. 작가는 아주 밝은 빛이 투사된 꿈을 ‘함께’꾼다. 물감과 붓질 사이로 의식과 무의식이 교묘하게 얽혀들고, 기억과 망각이 서로의 경계로 흘러간다.

아트페이스 휴 대표 김노암

12. 정일

 

정일은 추상미술과 연결된 모더니즘이나 구체적 현실의 묘사작업과는 거리가 먼 환상적 세계를 그려왔다.「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동화」를 생각나게 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상상과 환상의 무언극을 위한 무대가 그의 조형세계였다. 이와 같은 환상적 그림은 잠시 우리의 현실을 잊게 할뿐만 아니라 현실 저편의 아름다운 세계를 방문하는 독특한 미술로 어느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기호나 암시적 형태로 상징화된 환상에 머물고 있지만은 않다.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자세는 직선적이며 대단히 솔직하게 나타난다. 즉 형식적 틀을 없애버린 어린아이와 같은 그림이 그의 조형적 특성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어린아이처럼 만들고 있다. 누구나 사랑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그의 그림은 방황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속삭임으로 현실 저편의 아름다운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